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돌프 히틀러 (문단 편집) === 아돌프 히틀러와 종교 === 일단 명목상으로는 가톨릭 영세를 받았으나 하지만 히틀러는 부모에게서 독립 후에 가톨릭의 [[미사]]와 [[7성사]]의 참여는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Rißmann, Michael (2001). Hitlers Gott. Vorsehungsglaube und Sendungsbewußtsein des deutschen Diktators] 또 1931년 나치 지도층 전체가 함께 [[파문]]을 당하면서 가톨릭으로부터 멀어졌다. 아돌프 히틀러의 종교관은 아주 좋은 떡밥이며, 기독교인이나 유신론자는 아돌프 히틀러가 무신론자나 반기독교주의자였다고 주장하고 [[반기독교]]주의자와 반종교주의자들, 그리고 일부 반가톨릭적 성향이 강한 [[개신교]]인들은[* 나치 집권 당시에 가장 나치가 유화적인 종교는 다름아닌 개신교였다, 나치는 [[마르틴 루터]]를 보고 교황의 속박에서 독일을 해방시킨 영웅으로 선전하기도 했으며, 쾨니히스베르크에서 고위 나치당원인 에리히 코크는 아돌프 히틀러와 마르틴 루터를 비교하면서, 나치가 루터의 정신으로 싸운다고 연설하기도 했다. 가톨릭 교회는 나치가 독일 정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자 비판해왔다. 이를테면 1931년엔 나치의 지도자층을 단체로 파문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의 3분의 2가 개신교 신자들이었다. 그러나 개교회주의가 만연한 개신교 특성상 모든 독일 개신교 전체가 히틀러를 옹호한 건 결코 아니었고 개신교계 상당수 교파들은 오히려 나치 독일에 의해 탄압 받았다. 세기의 개신교 목회자 [[디트리히 본회퍼]] 같은 목사도 '미친 운전자가 행인들을 치고 질주할 때, 목사는 사상자의 장례를 돌보는 것보다는 핸들을 뺏어야 한다.'며 아돌프 히틀러의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암살 작전]]에 동참했고 종전 한달 전에 나치에 의해 처형당한다.] 아돌프 히틀러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고 주장하지만 그러나 꼭 가톨릭에 한정된 건 아니고 다른 주장으로는 아돌프 히틀러가 오히려 개신교에 가까웠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http://www.antinews.or.kr/bbs/board.php?bo_table=102&wr_id=939|#]] 물론 아돌프 히틀러가 기독교인이었든지 무신론자였든지 그 사실이 [[기독교]]나 [[유신론]], 혹은 반기독교주의나 [[무신론]]이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종교가 걸려 있기 때문에 오늘도 논쟁이 끊일 날이 없다. 아돌프 히틀러는 많은 연설에서 무신론에 반대하고 [[기독교]]를 긍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Norman H. Baynes, ed., The Speeches of Adolf Hitler, April 1922-August 1939. Vol. 1.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42. 아돌프 히틀러가 헌신적인 신자라고 말한 기사들은 다음 2개다. John Toland, Adolf Hitler. New York: Anchor Publishing, 1992, p. 507 / Michael, Robert (2008). A history of Catholic antisemitism. New York: Macmillan, p. 111] 그리고 연설뿐 아니라 일부 측근들은 아돌프 히틀러를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허나 이를 표면적으로 받아들이고 아돌프 히틀러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단정지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당시 80%가 기독교인이었던 독일을 비롯한 당시 유럽 기독교 국가에서 독실한 신앙을 가졌다고 주장하지 않는 우파 정치인은 거의 없었다. 무신론=볼셰비즘으로 낙인 찍던 시대이다. 현재도 세속화가 상당히 진행된 유럽에서도 무신론자임을 자처하는 국가 지도자는 잘 나오지 않고 있으며, 미국 같으면 정치인이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하면 정치적 자살이나 마찬가지다. 아돌프 히틀러는 공식석상에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데, "하느님의 거룩한 사명" 같은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좋아했고, "가톨릭적 도덕관을 바탕으로 한 국가를 세우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는 말을 하기도 했고 [[기독교]]를 정치적으로도 자주 써먹었다. 당시엔 "무신론 = 공산주의"라는 일반화가 통용되는 시대였으니 무신론자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일도 당연히 서슴치 않았다. 따라서 당시에는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인이라는 위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돌프 히틀러가 기독교인인지, 다른 종교인인지, 무신론자인지 알 수 없지만, 다음은 아돌프 히틀러가 어떻게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는지 보여주는 문구이다. >민족주의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은 특별히 각자 자기의 이름으로 사람들이 단지 피상적으로 신의 뜻을 얘기하는 것을 중단하게 하고 실제로 신의 뜻을 실행하게 하여 신의 말씀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만들 성스러운 의무를 지닌다. 왜냐하면 신의 말씀은 인간에게 그 형체와 정수와 그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그의 작업을 파괴하는 자는 주님의 피조물, 그 성스러운 의지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일깨워, 원한다면 각자 그 자신의 이름으로, 모든 사람이 누구든 그 활동에 있어서 말이나 행동으로 그의 종교적인 공동체의 한계를 벗어나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사람을 반대하는 것을 일차적이고 가장 성스러운 의무로 삼게 하라. >(중략) >따라서 오늘 나는 전능하신 신의 의지를 따라 행동하고 있다고 믿는다: 나 자신을 유대인으로부터 방어함으로써 나는 주님의 일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 >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 랄프 만하임([[https://en.wikipedia.org/wiki/Ralph_Manheim|Ralph Manheim]])[* 유대계 미국인 번역가. 1907~1992] 영역, 먼소류[* "뭔 소리유?"를 다소 바꾼 필명인 듯한데 역자 정보가 불분명하다.] 한국어 역 이것저것 길게 말하고는 있지만, 결론만 따지고 말하면, 자신의 반유대주의가 종교(혹은 신의 의지)에 의해서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퓌러께서는 최종 해결책의 임무를 맡은 자들에게 살해가 가능한 한 인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알렸다. 이것은 해충으로 가득한 세상을 정화하라는 신의 명령에 봉사하고 있다는 그의 확신과도 일치했다. 로마 교회의 계급을 혐오하면서도 여전히 로마 교회의 평판 좋은 회원인 그는 유대인이 신을 살해한 자들이라는 그들의 가르침을 항상 지니고 다녔다. 말살 정책은 따라서 비개인적으로 잔인하지 않게 행해지는 한은 그가 단지 신의 복수의 손으로서 행동하는 것이었으므로 양심에 거리낌 없이 수행할 수 있었다. >---- >John Toland (Pulitzer Prize winner), from "Adolf Hitler", pp 507, talking about the Autumn of 1941. 이것도 마찬가지. 아돌프 히틀러는 세간의 비난을 받기 쉬운 학살을 정당화 시키려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유대인들은 신을 살해한 자들'이라고 매도했고, 그 매도를 진실로 받아들인 사람의 기록이다. 유대인을 예수를 살해한 자라고 비난한 건 아돌프 히틀러가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히틀러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많은 발언을 남기기도 하였다. 1941년에 그는 나치 중위들에게 기독교적 세계관과 게르만 영웅적 세계관 사이에는 풀 수 없는 모순이 있다. 그러나 이 모순은 전쟁 중에는 해결할 수 없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라고 발언을 하며 전후 기독교의 체계적인 말살을 암시하는 듯한 발언을 남겼다. 또 나치 신문 편집자였던 한스 지글러에게 히틀러는 "당신은 알아야 할 것이다, 나는 비종교적이다. 나는 그것을 비기독교인이라는 의미로 이해한다."라고 발언하기도 하였다. 히틀러가 무신론자였다는 증언도 있다.오토 슈트라서와 히틀러의 친구 에른스트 한프슈팅글은 히틀러가 무신론자였다고 증언한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당시 정치세계에서 무신론자임을 드러내는 건 정치적으로 큰 리스크였고, 이 둘은 히틀러와 후에 척을 진 인물들이기에 그의 이미지를 깍아먹기 위해서 과장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히틀러의 예수에 대한 이해는 굉장히 괴상했는데, 그는 예수를 유대인과 맞서 싸운 아리아인이라는 시각을 가졌다. 실제로 1921년 4월 연설에서 히틀러는 예수를 금발벽안이라고 주장했으며, 1922년 11월의 연설에서는 예수를 게르만인이라고 주장했다. 또 히틀러의 측근 오토 바게너에 따르면 히틀러는 예수의 추종자들이 그의 시신이 숭배의 대상이 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 무덤에서 고의로 숨겨졌다고 발언하여 기독교의 핵심교리인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 부정하였다. 아돌프 히틀러는 어릴 적 [[가톨릭]] 세례를 받아 기독교인이었으며 유럽의 보편적인 기독교 문화에 대놓고 반대하지 않았고 좀 불만이 있었어도 독일 민족이 2000년 동안 기독교에 동화되어 버려서 어쩔 수 없다고 봤다. 힘러처럼 대놓고 반기독교적 성향을 드러낸 적은 한 번도 없다. 즉, 아돌프 히틀러는 독실한 가톨릭교도는 아니었지만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적어도 형식적인 기독교인이라는 점을 공개적으로 자주 보여줬다. 연설에서 시도 때도 없이 쓰는 네덜란드식 감사 기도[* 연설 말미에 "주여 우리를 자유롭게 하소서!"라는 문구로 끝낸다.]라며 공식석상에선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측근과의 대화에서나 1927년 밤베르크 회의에서 나치당 강령을 두고 회의 시엔 "당 강령은 안 바꾼다. 성경은 모순 덩어리지만 기독교의 확산을 막지 못했다."라고 못박은 적이 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는 수많은 [[성직자]]를 자신에게 반대한다는 이유로 탄압했으며 가톨릭을 틀려먹은 종교(Wrong Religion)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개신교의 경우에는 가톨릭에 비해서는 덜 한편이기는 하였으나 반나치 성향 고백 교회 목사들 700명을 게슈타포가 체포해서 수용소로 보내기도 한 것을 보면 어디까지나 자신에게 거슬리지 않는 경우에 한정된 이야기로 보인다. 가톨릭 사제나 수도자도 마찬가지. 나치당 내의 개신교도를 억압하자는 주장에 반대하였고, 심지어 나치와 개신교의 충돌을 막고자 "게르만 기독교 신앙운동"을 열기도 했다. 개신교가 가톨릭과 다른 점이 독립된 종파이며 중앙 조직이 없다는 점인데 가장 크게 반발했던 부분이다. 세례받은 유대인을 탄압하거나 서로 다른 개신교 종파를 억지로 "독일 민족 교회"라는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서 국가에서 관리하고자 할 땐 개신교계에서도 크게 반발했다. 이는 독일 개신교 내에서 반나치 운동이 일어나는 원인 중 하나가 됐다. 대표적인 예가 독일 고백교회를 이끌었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다. 또한 다른 나치 추종자들이 아돌프 히틀러의 뜻을 거스르기 어렵다고 본다면 돌격대와 친위대는 가톨릭 사제들을 "로마의 첩자", "남색집단"이라고 폄하했고 괴벨스는 가톨릭 사제들을 가리켜 "검은 무뢰한들"이 동성애적 성향으로 독일 청소년들에 성적인 폭력을 동반한 악영향을 끼친다고 비난했으며, 힘러와 친위대는 신비주의와 실체도 없는 게르만 민족종교나 찾아다니는 등 반유대-반기독교성향이 뚜렷했고 총통 비서인 마르틴 보어만은 "국가사회주의와 기독교는 양립할 수 없다", 뉘른베르크에서 처형당한 인종학자 알프레드 로젠베르크는 "독일이 살아남으려면 십자가가 떨어져야 된다."라고 주장했다. 괴벨스도 가톨릭 장학금만 먹튀하고 신앙은 일찍 버렸다.[* 학창 시절 반가톨릭적 글을 발표했는데 이 때문에 장학금을 박탈당할 뻔해서 본인과 아버지 등 주변 인물들이 사정 사정한 끝에 박탈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괴벨스 집안이 상당히 가난했고 본인 또한 장학금에 의존해 공부를 이어나가던 환경이었던 걸 감안하면 상당히 근시안적인 행동이었다고 평하지 않을 수 없다.] 평전 작가 이안 커쇼는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의 의지와 운명만을 믿었다고 평가했고 아돌프 히틀러와 스탈린을 비교한 <독재자들(Dictators)>을 저술한 영국의 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는 "아돌프 히틀러는 교회를 파괴하진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정치적 관점에서 판단으로 독재체제 내에서만 허용되었다"라고 평가한다. 종국에는 소련 공산주의와 국가사회주의는 종교와 양립할 수 없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아돌프 히틀러도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힘러와의 사적 대화에선 "기독교 교리는 과학이 진보하기 전에 낡아버렸다."라고 평가했다. 독일이 기독교 국가임을 부정할 수 없어서 정치적으로 이용했고 적극적인 탄압은 없었으며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대부분의 가톨릭 교회 및 독일 개신교 교단의 성향상 나치의 종교 정책에 대체로 순응했으며 반나치 성향의 고백교회를 제외하고 적극 이용당하고 소극적으로나마 협력했다. 아돌프 히틀러가 이교도라는 주장도 있으며 아돌프 히틀러는 이교, 즉 게르만족의 전통 믿음인 [[북유럽 신화]]에 관심을 보이고 독일의 신앙을 기독교에서 이교로 갈아치우려 했다는 음모론도 있다. 실제로 나치는 크리스마스 때 산타가 아니라 오딘이 선물을 준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혹은 예수의 출신을 북유럽의 영웅으로 조작했고 이에 반대하는 성직자들을 제거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돌프 히틀러는 다른 나치 고관들인 [[루돌프 헤스]]나 [[하인리히 힘러]]와는 달리 신비주의적이나 이교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다. 헤스나 힘러는 기독교 이전 시대의 아리안족 고유신앙을 재구성한답시고 [[룬]] 문자가 새겨진 비문들을 수집하거나 인도나 페르시아의 고대 종교들을 연구하는 등의 기행을 일삼았으나, 아돌프 히틀러는 오히려 이러한 행동들을 비웃었다. 실제로 힘러가 1938년에 "아리아인의 뿌리를 찾겠다."라며 친위대원들로 탐사대를 꾸려서 [[티베트]]로 보낸 적이 있는데 이게 아돌프 히틀러 귀에 들어가자 예산을 함부로 낭비했다는 일갈이나 들어야했다. 슈페어의 회고록에 의하면 아리안 드립은 쳤지만 고고학적 발견엔 별 관심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엄청난 유적과 유물들이 남아있는데 우리 조상들의 유물로는 돌도끼 같은 것이나 발굴되면 쪽팔리니까 그만두자는 것이었다. 힘러와 후에 나치 내에서도 정신상태가 맛이 갔다고 여겨지던 루돌프 헤스는 [[프리메이슨]]과 가톨릭 [[예수회]]가 세계를 정복하려는 국제 유대인 조직의 하수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힘러의 친위대에선 휴스턴 체임벌린의 영향을 받아 예수는 유대인이 아니라 아리아인이었다는 주장까지 펼쳤다. 나치당이 집권한 후엔 심지어 [[일본]]의 [[신토]]를 조국을 위해 희생한 영혼들을 숭배하는 위대한 종교라고 추켜올리는 발언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공자]]와 [[석가모니]]를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라고 했다고도 하는데, 역시 해석은 제멋대로에 엉망이라서 [[인도]]에 자리잡았던 아리아인들은 북부 독일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세웠던 지배인종이며 샤캬족도 그들의 후손이라는 개드립이나 치는 수준이었다. [[이슬람]]이 진정한 아리안의 신앙인데 망할 [[카롤루스 대제]]가 이슬람의 북상을 저지했기 때문에 "기독교처럼 순종적이고 무기력한 종교가 모국의 종교로 자리잡게 됐다."라는 발언을 했다는 [[알베르트 슈페어]]의 증언도 있다.[* Speer, Albert. . New York: Simon & Schuster, 1997] >'''내가 유일하게 존중해주는 종교는 [[이슬람]]이며, 내가 유일하게 존경하는 선지자는 [[무함마드]]이다.''' >---- >- 아돌프 히틀러 아돌프 히틀러는 위 발언처럼 [[이슬람교]]에 대해서 호의적인 발언도 하였다.[* 지금의 이슬람 근본주의에 물든 시각으로 보면 이상하다 생각하겠지만 이는 당시의 시대상 또한 감안해야한다. 제 1차 세계대전때만 해도 이슬람 국가였던 오스만 제국은 상당한 기술과 윤리관을 가진 하나의 열강이였다.] 물론 일본의 신토 관련으로 발언한 것과 같이, 이 또한 외교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남긴 발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2차 대전이 진행되면서 독일은 예루살렘의 大무프티 [[아민 알 후세이니]] 휘하의 팔레스타인계 아랍 민병대들을 꼬셔다 반영 반란을 부추기려고 노력했다. 실제로 슈페어에게 "아랍인들은 아리아인들보다 한 수 아래다"라는 발언을 직접 하기도 했다고 한다. 다만 히틀러가 그러면서도 아랍인들의 일사불란한 군사 문화에는 깊은 감명을 받은 듯하다는 게 슈페어의 회상이었다. 실제로 힘러에게도 친위대 내부에 무슬림 분과를 마련해놓으라고 했다는 증언도 있다. 아돌프 히틀러가 스스로 예수라고 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목사 및 신부 탄압과 기독교 탄압이 "자신을 예수로 인정해주지 않아서"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를 "재림 예수"처럼 꾸며낸 일등공신은 괴벨스이며 기독교 문화권에서 친숙한 성자나 구세주적인 이미지를 쓴 것에 불과하다. 현재 한국에서 유교 드립 친다고 해서 상투 틀고 갓 쓰면서 청학동에 사서삼경 외우는 사람이 아니듯이 당시 사람들에게 친숙한 기독교적 소도구를 사용한 것에 불과하다. 오히려 저 루머는 목사와 신부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다가 실패하고 탄압했다는 것이 와전되어서 생긴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아돌프 히틀러가 종전 후 기독교를 말살하려고 계획했다는 설도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Religious_views_of_Adolf_Hitler#Long_term_plans_for_the_churches|영문 위키피디아 자료]] 아래는 위 내용을 대충 간추려서 번역한 글이다. ||앨런 불록(Bullock)은 전쟁이 끝난다면 (아돌프 히틀러는)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을 파괴하고 뿌리뽑으리라 스스로 다짐했다.고 썼다. 미첼 페이어(Phayer)는 1930년대 후반기까지 교회 관계자들은 아돌프 히틀러와 다른 나치당원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그리스도교의 완전한 말살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독일 국민들의 절대 다수가 그리스도인들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목표는 나치의 단기적 목표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장기적 목표가 되어야만 했다.고 적었다. 1999년 Julie Seltzer Mandel은 뉘렘베르크 프로젝트의 문서들을 연구하던 도중 도노반(William Donovan) 장군이 나치의 전쟁 범죄를 문서화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수집한 한 세트인 150권의 기록을 발견하였다. 도노반은 미국 검사팀의 수석요원이었으며 나치당의 교회 박해에 대한 많은 양의 증거를 모았다. 108쪽의 개요문서인 나치당의 종합 계획에서 [[미국 전략사무국]]은 나치 정권은 조직적인 박해를 통하여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을 축소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보고서에서는 민족사회주의당(national socialist party)의 주요 지도자들은 그리스도교의 완전한 말살과 순수하게 인종에 근간을 둔 종교로 대체하는 이러한 상황을 반겼을 것이라고 서술되었다. 가장 유력한 근거는 박해 그 자체가 가지는 조직적 본성이다. 아돌프 히틀러의 동유럽 독일화 계획에서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안배는 전혀 없을 것이었다. 그때까지 당분간은 아돌프 히틀러는 이러한 교회 문제에 대하여 느리게 진행할 것을 지시했다. 가장 반교회 성향이 강하고 공격적인 인사 중 하나였던 괴벨스는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이러한 문제는 전후에 반드시 해결되어야만 하고, 이는 즉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교와 독일 전통 이교 신앙 사이에는 매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고 밝혔다. 불록은 전쟁이 끝난다면 (아돌프 히틀러는) 그리스도교 교회의 영향력을 파괴하고 뿌리뽑겠지만, 그 순간이 도래하기 전까지는 신중함을 유지하기로 스스로 다짐했다.라고 적었다. Yad Vashem에 기고한 글에서 역사학자 미첼 페이어는 1930년대 후반까지, 교회 관계자들은 아돌프 히틀러의 장기적인 목표가 그리스도교의 완전한 멸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하였다. 아돌프 히틀러의 수석 설계자였던 알베르트 슈페어는 회고록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새 베를린 초안을 구상할 당시 그가 아돌프 히틀러의 개인 비서였던 마르틴 보어만에게 가톨릭과 개신교 관계자들에게 교회의 위치에 대하여 논의하였다고 하자 보어만은 짧게 교회들은 건물 위치를 배정받지 못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나치가 기독교 말살을 계획했다는 주장 자체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상당한 근거를 들어 제출된 바가 있고(본문에서 언급되는 도노반 장군의 자료들이 재판에서 제출되었다.) 첫 문단에서 인용하고 있는 앨런 불록의 나 미첼 페이어의 등에도 실려 있다. 도노반 장군의 자료들의 내용을 요약하면, >나치 전범에 대한 뉘른베르크(Nuremberg) 국제재판은 무려 6백만의 유태인을 살해한 Holocaust 사건을 나치의 인종학살 계획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것을 증명하고 고발하였다. 미국의 고소인단을 이끌었던 윌리엄 도노반 장군(General William Donovan)은 나치가 유태인 학살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체계적 파괴도 계획하였다는 내용을 담은 방대한 분량의 문서들을 제출하였다. 도노반의 문서들무려 150 권에 달하는 장정본(裝幀本)은 1959년 도노반이 죽은 후에 코넬(Cornel) 대학교에 보관되었다. 지금은 Rutgers Journal of Law and Religion에서 internet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이 범죄적 음모에는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선전부장 요셉 게벨스(Joseph Goebbels), [[히틀러 유겐트]]의 지도자 그리고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의 피고인 발두어 시라크(Baldure Schirach)를 포함한 나치당의 정상급 핵심 요원들이 연루되어 있었다. 이 문서에 의하면, 나치는 기독교회가 애초부터 나치의 인종차별과 정복전쟁 계획에 반대 입장을 견지한다는 이유로 제압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했다.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하여 나치는 교회의 내부에 침입하려 하였다. 즉, 중상모략, 체포, 습격 등을 획책하고 목회자를 살해하고, 신도의 사상을 개조하며, 교회 학교와 청소년 조직에 침입하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성경 중심의 복음주의 교회는 타협적인 교회에 반대하면서 대(對) 나치 항거의 전면에 나섰다. 성경의 무오설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견지하지 못했던 자유주의 교회들은 집권자의 친-진화론적 이념에 기독교 교리를 끼어 맞추려는 기도의 일환으로 기독교 교리를 서슴없이 재해석하려 하였다. 그것은 오늘날 다윈의 과학적 이론에 추종하려는 현상과 유사했다. 일찍이 1937년에 벌써,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나치 정책에 반대한다고 선언한 바 있다. 그러자 나치는 이를 보복하기 위하여 700명의 목회자를 체포 구금하였다. 인본주의자와 자칭 민간 자유주의 단체는 창조설을 교회 내에 국한시키자, 그리고 모든 기독교의 영향을 대중의 생활과 학교로부터 말살하자고 외쳤다. 이 불길한 외침에 보조를 맞추어 여러 교파의 교회들도 종교 활동을 가능한 한 좁은 범위 안으로 한정하려 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자진하여 축소한 활동범위 위에 더 많은 제약을 막무가내로 가하려 하던 나치의 방해 공작에 교회는 속수무책이었다. 기독교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이러한 현상은 나치의 점진적 잠식을 위한 용의주도한 기독교 말살 계획을 진전시키는데 도움을 주었고, 교회의 조직체계를 나치의 정치목적에 이용당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기독교 혐오에 대해 일단 아돌프 히틀러 본인이 직접적으로 남긴 발언은 상술했듯 기독교가 "너무 순종적이고 무기력한 종교라서 싫다"는 거였는데, 다만 이 또한 어떤 경로로 기독교를 "순종적이고 무기력한 종교"라고 생각하게 되었는지가 극히 불분명하다. 순수하게 신학적으로만 따져본다면, 기독교를 비롯한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의 대다수가 [[최후의 심판]]을 예언하고 있으나 이 중에서 최후의 심판 직전에 '''대전쟁이 지상을 휩쓸고 지나간다'''고 예언하는 종교는 기독교가 유일하다. 물론 이는 [[요한묵시록]]의 문헌적 특수성을 감안해야 하는 점도 있으나 일단 이것만 놓고 본다면 기독교가 비슷한 계통의 다른 종교들에 비해 "순종적이고 무기력하다"고 보기는 어려운 부분이다. 결국 이 또한 신학적 이해 없이 그냥 되는대로 발언하고 보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외 히틀러의 여러 연설과 주변인들과의 발언을 토대로 그의 종교관을 분석한 리처드 위카르트(Richard Wikart) 교수는 그가 범신론적 성향을 지녔다고 저서에서 밝혔다. 실제로 히틀러는 1941년 연설에서는 "자연의 영원한 법칙 앞에서 인류는 무력합니다. 인류 전체의 구원은 신의 섭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인간이 그 법을 거역할 수 있다는 게 거짓이라는 걸 인지하게 된다면 결코 해로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신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신과 자연의 법칙을 동일시 하면서 적자생존의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게 신의 뜻에 부합하다는 그의 종교관을 내비쳤다. 이렇게 아돌프 히틀러의 종교에 대한 설은 다양하지만 공통된 사실이 있다면 이러한 설들에 대해 일관성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나치나 아돌프 히틀러 관련하여 공신력 있는 서적들에서 종교 탄압은 꼭 한 챕터씩은 다루고 있다. 페스트 <아돌프 히틀러 평전>, 이안 커쇼 <아돌프 히틀러>, 리처드 오버리 <독재자들>,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나치시대 일상사>, 귀도 크놉 <아돌프 히틀러의 뜻대로>, 마르틴 브로샤트 <히틀러 국가>, 슈테판 마르크스 <나치즘 열광과 도취의 심리학>, 간접적으로 다룬 책들 중에 폴 존슨 <모던 타임즈>,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등이 있다. 다만 [[반기독교]]와 같은 동기, 신념과 기독교에 대한 증오, 혐오로 탄압했기보다는 정치적으로 나치와 자신에게 방해가 될 때에만 탄압했다. 그래서 히틀러의 종교관에 대해서 '애초에 종교에 대한 일관적인 관점이나 사상 자체가 히틀러에겐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때 그때 권력에 이용하기 위해 태도를 달리하였을 뿐이다'라는 해석도 존재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